본문
책소개
수양명행
수양대군은 임신년(1452년) 10월부터 계유년(1453년) 2월까지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딱 1년 하고도 보름인데, 상황이나 배경 또는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기 위하여 시간을 넘나들기는 하나, 가장 큰 줄거리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넉 달 반 수양대군의 명나라 행차다.
수양대군의 사행길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므로 정치적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지만, 계유년의 정난도 중요한 모티프이며 클라익맥스다. 수양대군은 명나라에서 돌아와 약 7개월 뒤에 계유정난을 일으키게 된다.
계유정난과 수양대군
수양대군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은 역시 계유정난일 것이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이 조선의 임금에 오르는 핵심적 계기이며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의 굵은 사건이다.
계유정난을 이야기할 때 수양대군은 언제나 대개 악으로 묘사되고 있다. 수양대군이 악이라는 평가와 인식은 단종대왕이 영월에서 죽임을 당한 뒤 고착되었다. 아니, 단종대왕이 세조 3년 (1457년) 6월 21일 첨지중추원사 어득해(魚得海)가 거느린 군사 50명과 군자감 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판내시부사 홍득경(洪得敬)에게 둘러싸여 영월로 내려갈 때부터, 그리하여 단종대왕과 정순왕후 송씨가 눈물을 뿌리며 이별하던 때부터 세조대왕, 즉 수양대군은 악한이 되었다. 그보다, 왕위에 오른 뒤 세조 2년 (병자년이며 1456년)의 고변으로 사육신 등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부터였다. 따지고 보면 그 이전에, 단종대왕을 상왕으로 물러 앉히고 왕위에 오른 시점에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정난을 일으킨 것부터 수양대군은 악인의 대명사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수양은 그러한 평가와 인식에 대하여 십중팔구는 스스로 책임이 있다.
흔히 수양대군을 묘사할 때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말 또한 역사적 사실성이 없다. 왜냐하면, 죽였다든지 빼앗았다든지 하는 표현의 과장은 차치하고라도, 수양대군은 조카를 죽인 뒤에 왕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왕위를 빼앗은 뒤에 조카를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시간의 선후를 바꾸면 역사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는 시간 축에서 선후가 분명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영어로 causality, 우리말로 인과율(因果律)이라고 번역하는 법칙이 성립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의 전후를 바꾸면서까지 사건을 서술하는 이유는 수양대군에 대하여 악한 인상을 덧씌우기 위함이 아닐까. 역사적 사실에서 틀리든 말든 수양대군의 악역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일부 대중을 바로잡기는커녕 그들의 왜곡된 통념에 편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양명행》은 그러한 부정적인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수양대군을 변호하기 위한 글이다. 아니,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기술하였다기보다 그저 객관적인 입장에서 썼다. 게다가, 《수양명행》은 그 시간적 배경이 문종 2년 (1452년) 2월 8일부터 단종 1년 (1453년) 2월 26일까지 딱 1년 보름 동안인데 계유정난은 단종 1년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나므로 《수양명행》에서 계유정난은 현실적으로는 다루어질 수 없다.
수양대군의 꿈
수양대군이 본격적으로 조정의 대신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다. 그래서 《수양명행》에서는 시간상, 수양대군과 조정의 대신들은 아직 갈등 구조에 갇혀 있지 않다. 위기감이라든지, 팽팽한 긴장감이라든지, 모략이나 대립은 등장하지 않는다. 서스펜션이 강하거나 클라이맥스가 있으리라 기대하면 실망할 것이다. 초조하거나 긴박하지도 않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밋밋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큰 흐름을 따라 천천히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면 수양의 면모를 부지불식간에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양명행》에서 계유정난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양대군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수양명행》이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기술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단종대왕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수양대군은 고명대신이라 자처하는 대신들을 제거하여 단종대왕을 보호하고 종실을 지키는 것이 목표였다. 청군측(淸君側), 즉, 제군측지악(除君側之惡)이었다. 그것이 수양대군이 꿈꾼 정난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수양대군은 영락제의 장릉에서 꾸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수양대군의 꿈 이야기는 제8권에 나온다.
《수양명행》은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수양대군의 명나라 행차가 가장 중요하며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양명행》은 하나의 사행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와서 기록한 사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많고, 수양에 앞서 조선을 다녀간 명나라 사신 예겸의 《조선기사》도 있지만, 이 글도 단단하고 빈틈없는 하나의 사행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충실히 구성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도록 관련 문헌과 학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역사와 지리를 훑어가면서 사행로를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1년의 과정을 담다
《수양명행》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마지막 대결이 아닐까. 흔히 사극 드라마에서는 김종서의 죽는 순간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자니 칼부림이 난무하고 피투성이의 김종서가 거꾸러지는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기 일쑤이지만, 《수양명행》에서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마치 정안군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와 단심가를 주고받았듯이, 수양과 김종서가 시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수양이 오언절구를 내자 김종서가 화답하여 시조를 읊는데, 그것이 그들의 최후 담판이었다. 이 장면은 물론 허구이다. 하지만 덮어놓고 칼부터 휘두르는 무지함보다는 두 사람의 풍모가 돋보이며, 서로의 의사를 타진하는 방법으로서 문화적 풍류를 누렸다고 생각한다.
《수양명행》은 단 1년 정도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전8권 4,400페이지에 달한다. 명나라에 다녀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그래서 《수양명행》을 읽으려면 긴 호흡이 필요하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랄까, 전후의 상황이랄까, 조선 초기로 돌아간 기분으로 아주 천천히 글을 음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한시도 감상하면서 말이다.
목차
어느덧 일흔
함길도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고려사》
김종서와 정인지
집현전
빛나던 40년
저 자
소 개
저자 소개
오선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지냈다. 경기 중고와 서울대를 거쳐 KAIS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건국대학교 물리학과에서 38년간 봉직하고 2017년에 정년이 되었다. 그동안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British Council Scholar로, 독일 아헨 공대에서는 DFG program으로 지원을 받고 지내기도 하였으며, 2000년부터는 OECD 산하 Global Science Forum의 한국위원으로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수양명행》을 구상하기는 일찍부터 하였으나, 첫 논문의 다운로드 날짜가 2013년이었으니 본격적으로 학계의 논문을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이후 약 8년간 수백 편의 논문을 읽었으니, 학력으로 치면 사학 전공 대학원생에 버금가지 않을까. 아무튼, 방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수양명행》이라는 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